아버지는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11남매중 4남으로 태어나셔서

어릴적부터 위로는 형들의 수발을 들고 아래로 동생을 챙기셔야 했다.

오로지 취미라고는 산 속에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신우대를 잘라 동네 방죽에서 막내삼촌을 데리고 아무말 없이 하는 낚시셨고

그나마 많이 잡지 못하면 시간 축 낸다고 혼꾸녕이 나셨다고 한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찰나

그 시기가 하필이면 큰 아버지 대학입학과 겹쳐 결국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의 대학진학을 위해 다른 자식의 고등학교 입학을 막는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집안에 아들 한 둘 이나 성공하면 자식농사 잘 지은거라고 여겼던 그 시절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나보다.

그렇게 시골에서 농사로 세월을 보내다 어머니와 선을 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마음에 드셨지만 어머니는 내심 별 직업도 없고 키만 크고 말도 없는 아버지가 별로였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탐탁치않으셔서 결혼을 반대 하셨는데

아버지는 아랑콧않고 며칠이고 외할아버지댁에 찾아와서 그저 마루 귀퉁이에 조용히 서 계셨다고 했다.

그 싱거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불쌍해보였는지 어머니가 결혼을 승낙하셨고

그들은 새 보금자리를 광주에 틀게 된다.

없는 시골살림에 무슨 혼수가 있을수가 있나

더군다나 11남매의 4남 7남매의 장녀 사이의 결혼 아닌가

두 집안에서 논 한뙈기 팔아주지도 않아 그분들은 광주 중흥동 겨우 몇 만원 하는,

철로가 방 바로 뒤에 있어 기차가 지날때면 온 집안이 흔들리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삯월세 방에서 신혼을 보낸다.

아버지는 한국통신에 취직을 하셔서 선로작업을 하시는 블루칼라 노동자가 되셨고

어머니는 가끔 밤을 까는 허드렛일을 하시며 태어난 두 남매를 키워내셨다.

도중에 광주로 입원하시는 할머니 병수발도 해야하고 광주에서 공부했던 외삼촌 막내삼촌과 함께 그 단칸방에서 산 적도 있다고 하니

그 고됨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으리라...


자라나면서 갖게 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다.

지극히 말 수가 없으셨고 주말이면 거의 낚시만 하러 다니셨기 때문에 가족사진에도 아버지가 있으신 경우는 드물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가끔 아버지의 낚시에 따라가 아버지가 낚는 파닥이는 붕어를 낚시 바늘에서 떼어 어망에 넣는것 을 거들었던 것이나

아버지가 그때 끓여주셨던 매운탕 그리고 아버지가 자주 잡수셨던 보해 골드.

가끔은 같은 회사직원집에서 하는 빵집에 빵이 남으면 검은 봉달이에 카스테라를 한아름 사들고 오셨는데

그것이 매우 달콤했던 기억도 난다.

심지어 우리에게 직접 화를 내셨던 적도 드물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자신이 어떻게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혹여나 우리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상처를 줄까봐

우리가 말썽을 피운 날이면 가만히 이불에 누워서 어머니에게만 이것저것 궁시렁궁시렁 자식교육을 왜 그렇게 시키냐는등의

푸념만 하셨다고 하니. 아버지가 눈빛이 이상한 날이면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무섭도록 우리를 다그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어쩌다 저녁에 반주가 과한날이면 어김없이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속상한 이야기를 하셨었는데

언제나 그 전화통화는 좋지 못게 끝났던거 같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일반전화 선로담당을 맡으셨는데

갑자기 인터넷 부서로 발령이 나셨다. 중학교밖에 나오질 못하셨는데 영어를 하실 일이 있나, 지금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것은 아마 권고사직 쯤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정리해고의 광풍이 불던 시절이니 말이다.

아버지는 외곯수에 자존심도 센데 말수도 적었으니... 그 모욕과 인고의 세월을 그렇게 1년넘도록 참아내고 계실줄은

그리고 아버지가 우울증을 앓고 계시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시절 그냥 집이 지겨웠었다.

맨날 들어야 했던 "너네 아버지는 맨홀 뚜껑 안으로 들어가서 껌껌한 지하에서 일 하는데 너네가 공부 열심히 해야지" 같은

레파토리도 지겨웠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아주 어렸을때부터 깨달은 후로 부터는 그런 나의 조숙함 조차

지겹고 그런 내 모습이 비루해보였다.

나는 그저 주야장천 듣고다니는 음악이나 가끔 읽는 소설, 시 그리고 그냥 멍하니 하는 공상을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삼았는데, 특별히 허무맹랑한 공상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사실 내가 어떤면에서는 조숙했지만 그 조숙함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고됨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노력으로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마도 고생을 덜 했거나 그냥 도피하려는 약삭빠름이 조숙함을 이겨냈거나

둘 중에 하나였겠지...하긴 고생을 그리 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아주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들의

희생을 오로지 우리 둘 에게 투자하셨으니 말이다.

여하튼 아버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는 계속 그 사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했었다는 생각이든다.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가기 싫어서 Back stage 라는 음악감상실에가서 그때 유행했던 Korn이랄지 Portishead랄지

그들의 노래를 줄곧 듣곤 했다.

아버지가 입원하셨을때는 조금의 희망으로 보기도 했었지만 퇴원하셔서 더욱 상태가 심각해지시고

집안에서 난잡한 안수기도나 통성기도나 이런걸 할 때면 정말 집에가고 싶지 않았다.

건장했던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사실도 그걸 고쳐보겠다고 불안속에 악다구니를 쓰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기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 날도 나는 집밖으로 아버지를 산책시키려 입씨름 하시는 어머니와 가시지 않겠다고 떼를 쓰시는

아버지 둘 다 밀쳐버리고 그렇게 집을 나왔으니... 정말 후회가 되는 일이다.

서른 넘게 세상을 살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 상상은 다소 유치하고 철없는 발상이지만

나는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루에 꼭 한번씩 그런 상상을 했다. 그 날로 돌아가서 내 귓방맹이를 한 대 갈기고 싶다고.

나는 대체 왜 그랬던 것인가.

나는 왜 대체 그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그를 내 밖으로 밀쳐내려고 그다지도 애를 썼는가...

왜 한번도 그를 따뜻한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는가.

비통한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현실감각이 무뎌져서 한동안 현실과 공상의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생활을 했다.

닥쳐져있던 고3 수험생활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고 공부도 흥미가 없었다.

때때로 한국통신 인트라 넷에 올렸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호소문이 알바의 글로 매도가 되고 난 이후로는

사회에 대한 실망도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그리고 그 부재가 얼마나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도 알지 못해서

마치 아버지란 존재는 나에게 그저 없었던 그런 존재로만 인식이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 유품을 정리를 했는데

아버지 수첩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글귀가 삐뚤빼뚤한 못생긴 글씨로 수 페이지에 걸쳐 씌여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지나쳐 버렸지만

나중에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고 나서는 이 일때문에 너무 많이 슬펐었다.

지금 그 수첩을 가지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는 그 당시 아버지를 내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아마 태워버렸던 것 같다. 촌스러운 프렉탈 무늬 잠바와 밥알이 들러붙어 그걸 떼 내느라 몇 군데 쥐 뜯어먹은 것 같이 뜯겨있던 골덴바지와

시계 그리고 사원증 그게 다였던 기억이 난다.


시험은 그다지 잘 보지 못했지만 운이 좋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하고

나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술도 많이 마셨고 멋드러지게 사진도 찍으러 다녔고

열정도 없었던 철학과에 들어가 나름 골똘히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었다.

물론 여자친구들도 만났었는데

초기에 만났던 친구들에게는 미안하게도 많이 신경질적으로 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들 모두 그 시절 나를 지탱해준 좋은 친구들이라, 요즘은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말을 전할 시기가 지나버렸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여전히 그 시절에도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철저히 지워냈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결국엔

그가 어떤말을 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잃어가고 있던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가족간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깨닿게 된 것은

겨우 몇 년 전인데

누님이 졸업하여 의사가 되시고 아버지의 묘소를 어머니와 누님과 함께 방문했을때 일이다.

어머님은 아버지의 산소를 쓰다듬으시면서 그동안 당신 덕분에 자식들 잘 키우고 건강히 살아갈 수 있었다면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식구로 사신 것이 18년 헤어진지 10년이 되어갔을 무렵인데

나는 무엇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 고되고 모진 어떻게 보면 한과 고통으로 점철된 그 시간을 감사하게 만드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날 나는 14박 15일로 생고생을 해가며 아버지 산소에 혼자 당도를 했을때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비오듯이 줄줄 쏟아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비로소 미웠고

그때서야 아버지가 고맙고 보고싶었다.


그 뒤로 몇년이 흐른 지금도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나 모습 이런것들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에서라도 한 번 나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서

두 번 꿈에서 나오신 것이 전부다.

만약 내가 지금 죽어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게 된다면

그 모습 잊지 않기 위해 한참동안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고

그 목소리 기억하고 싶어 한참동안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주고 싶다.


아버지 아버지 아들내미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타향 저멀리서 아버지를 그리고 있어요.

가족이 보고싶고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언젠가 아버지를 도화지에 그려내고

아버지 하신 말씀으로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립습니다. 그리고 그리워 할 껍니다.






Posted by bassa

위로

2011. 10. 10. 01:57
오늘 나의 위로가 네게 닿기를

오롯이



직접 얼굴보고 위로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힘들었지? 라고 물어주고 싶은데

이런 아득한 거리에서

저런 활자 몇 개가 나에 마음을, 온기를 전해줄 수 없어 그만둔다.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차분하던 니 눈매가 선하다.







Posted by bassa